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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l opinion

애덤 스미스 국부론의 바람직한 이해에 관하여.

by 1972 trist 2022. 4. 25.

 

최근 들어 ‘극단적 자유 시장 신봉자’가 많이 보인다. 이들의 주장은 정부는 시장 논리에 따라 아무것도 하면 안 된다며 필자에게 국부론을 다시 한 번 읽어보라고 권유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최소한 시장에서 만큼은 정부의 어떠한 개입도 허용되어선 안 된다는 주장, 그런데 직접 그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꽤나 설득력이 있긴 하다. 

 

Adam Smith
애덤 스미스

 

극단적 자유 시장 신봉자들은 “기업이 돈을 벌면, 그 돈으로 직원을 고용할 것이고 그 직원이 일을 해서 기업이 돈을 더 많이 벌면 기업은 직원을 더 많이 고용하고, 공장도 더 많이 지을 것이고 이것이 반복되면 국가가 손을 대지 않더라도 기업이 욕심을 부리게 내버려두는 것만으로 나라가 부유해지고, 일자리가 늘어나고, 월급이 늘어나며 너도나도 모두 잘살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국부론/ The Wealth of Nations>에서 했던 주장이다. 그리고 그 주장은 명백한 ‘팩트’이기도 하다. 

 

인류가 애덤 스미스의 말을 받아들여 기업이 돈을 더 많이 벌수 있도록, 욕심을 더 많이 부리도록 내버려 두자, 시장은 정말로 끊임없이 불어났고 이로 인해 우리는 압도적인 물적 자원을 가지게 되었다. 부자들의 끝없는 이기심은 자유 시장을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 되었고, 어떻게 보면 자유 시장 위에서 이기심은 곧 이타심과도 같았다.

 

 

자동차, 에어컨, 스마트 폰, 음식 등 지금의 우리가 조선시대 왕 보다도 편리한 삶을 누리게 된 것은 전적으로 부자들의 이기심 덕분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부자들은 단지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려고 노력한 것뿐인데 남들의 주머니 또한 채워진다니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부는 항상 이 착한 부자들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다. 그리고 이런 정부의 괴롭힘은 실제로도 경제 성장에 악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다. 앞서 얘기한 극단적 자유시장 신봉자들이 본인의 경제적 상황과 관계없이 정부의 규제에 반발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기업이 돈을 벌어야 시장이 커질 것이고, 시장이 커져야 우리도 덩달아 부유해질 텐데, 대체 왜 칭찬은 못해줄망정 규제를 하고, 과세를 하면서 기업을 못살게 구냐는 얘기다. 애덤 스미스가 말하는 것처럼 시장이 알아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최고로 공정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극단적인 자유시장 신봉주의는 산타클로스가 존재한다는 믿음만큼이나 순진하다.”

 

Yuval Harari
사피엔스의 작가 유발 하라리

 

국가가 정말로 아무것도 안하면 어떻게 될까? 그 답은 인류의 오답 노트인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는 16세기 ‘설탕 제조 사업’이 시작되면서 크게 발전해 왔다. 이 설탕 제조 사업 덕분에 부자들은 더 많은 자본을 끌어 모을 수 있었고 서민들은 달콤한 사탕과 초콜릿을 먹으며 풍족하고 편안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당시 설탕 제조 사업은 국가에게 어떠한 통제도 받지 않았다. 순수한 경제 사업으로서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자유시장에 의해 조직되고 자금조달이 이루어졌다. 

 

설탕 기업은 주식 거래소에서 주식을 팔았고 국민들은 늘어난 일자리에 감사하며 풍족한 생활과 소비를 했다. 당시 설탕 사업은 지금의 ‘블록체인,’ ‘IOT,’ ‘3D 프린팅’같은 느낌의 사업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설탕 소비가 늘어나면서 수요가 대폭 증가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주 기발한 방법으로 인건비가 거의 나가지 않는다는 엄청난 장점을 가진 유망사업이었으니 말이다. 말라리아 감염 위험을 견디며 뜨거운 땡볕 아래 노동을 시키려면 천문학적인 인건비가 들어가기 때문에 유럽의 자본가들은 아프리카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시장의 발전을 위해 또한 인간의 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종종 노예무역은 인종 차별적 혐오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지만, 노예무역이 생긴 근본적인 원인은 혐오나 비도덕이 아니다. 설탕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흑인을 혐오하기는커녕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가 치킨을 먹을 때 공장에서 갈려 나가는 병아리를 떠올리지 않듯, 그들도 사탕을 빨며 그 달콤함을 즐길 뿐이었다. 심지어 사업을 주도한 무역회사의 경영자나 주주, 중개인 더 나아가 노예 농장 소유자조차 농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사업에만 열중하며 종이 서류만 들여다보았다. 

 

사실 수천만 명의 아프리카 노예가 수입되고 폐사된 근본적인 원인은 혐오가 아니라 자유 시장이었다. 물론 다행히도 18세기 후반 노예 폐지론이 대두되면서 노예무역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는 바로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는데, 7살 아이부터 80먹은 노인까지 노동자는 주당 90시간까지 일하며 지옥 같은 중노동을 이어나갔다. 일각에서 아동 노동에 대한 반발이 생길 때마다 기업의 내놓는 답변은 항상 “아이들의 일할 권리와 자유를 빼앗지 말라”였다. ‘기업의 이윤추구는 모두에게 좋다’는 말에 이론상 문제는 없다. 

 

industrial revolution boy worker
산업혁명 당시 소년 소녀 노동자의 모습

 

그렇다면 요즘은 어떨까? 시장 논리에 따르면, 회사 사장은 이윤 추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직원에게 친절할 수밖에 없다. 만약 회사가 월급도 짜게 주면서 야근까지 시킨다면 직원은 사표를 내고 다른 회사로 이직하면 그만이다. 폭군 같은 회사는 아무도 다니고 싶지 않을 것이고 기업은 이윤추구를 생각한다면 성과급도 주고, 복지도 챙겨주고, 직원 관리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론은 역시 이론일 뿐, 저녁 8시가 넘어서도 퇴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수두룩하다. 

 

기업의 이윤을 남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혁신적인 아이디어 상품을 개발해서 이익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직원의 월급을 깎고, 휴일을 없애면서 손해를 줄이는 것이다. 산업 전체를 부흥시키는 것보다 경쟁사를 죽이고 그 지분을 먹는 것이 훨씬 더 편하고 빠르다. 그리고 그보다 더 편하고 빠른 방법이 있는데, 바로 거짓말과 도둑질이다.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은 필연적으로 더 멀리, 더 넓게 보지 못한다. 

 

 

거위가 황금 알을 낳는다면 다른 사람이 채가기 전에 먼저 거위의 배를 갈라 뱃속에 있는 하나라도 더 챙기려는 것이 인간의 욕심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완전한 자유시장을 꺼리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이기심이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지언정 이타심이 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장 논리 허점은 점점 더 많이 발견된다. 공장에서 버리는 폐수가 환경에 나쁜 영향을 미칠지 정말로 몰랐던 것처럼, 만약 개개인이 예상하기 힘든 선택지가 생긴다면, 만약 자본가가 직원을 더 많이 고용하는 대신 자신의 집 지하실에 돈다발을 쌓아 놓거나, 중국발 유행 전염병이 퍼지면서 사회 자본 이동이 마비된다면, 결국 우리는 수많은 실패를 겪으며 이들의 독주를 막아낼 수 있는 막강한 브레이크가 필요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정부’인 것이다. 

 

South Korean government
대한민국 정부의 국회

 

정부는 기본적으로는 자유 시장의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다른 가치를 저버리지 않도록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집행할 경찰, 법원, 교도소를 설립하고 지원함으로써 신뢰를 보장하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역할은 ‘대한민국 헌법 제 119조 2항’에 잘 나와 있다.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선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틀은 그대로 두면서도 이윤 추구가 만든 틈새를 메우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정부 개입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고도 수급 균형을 이루는 데 실패한 사례는 정말 엄청나게 많다. 때로는 제대로 된 해결책이 아닌 구색만 갖춘 무분별한 ‘포퓰리즘’으로 실효성 없는 제지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이런 정부의 실패를 두고 갑론을박을 이어나가고 있다. 

 

필자도 이러한 정부의 실패를 정말 피해야 할 상황이라고 보고 있지만, 만일 이런 실패를 없앤답시고 ‘보이는 손’을 완전히 잘라버리자는 극단적인 주장을 한다면 최소한 누군가(애덤 스미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써야 할 것이다. 물론 애덤 스미스는 정부의 자유 시장 규제를 반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부론이라는 책이 쓰여진 당시 정부의 악법은 서민들이 경제적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압박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도 정부는 뒷돈을 받으며 특정 기업이 시장 독점과 착취를 하게끔 도왔다. 이런 맥락에서 애덤 스미스의 “정부는 자유 시장에 관여하지 말라”는 얘기는 사실 지금 상황과는 다르게 들린다.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애덤 스미스

 

애덤 스미스를 연구하는 다수의 학자들은 국부론은 경제적 약자를 지키기 위해 기득권의 독점을 없애려 한 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국부론과 그의 저서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을 펼쳐 본다면 우리의 편견과는 달리 애덤 스미스가 항상 약자의 편에 선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본가가 제안하는 새로운 상업적 법률 및 규제들에 대해서는 항상 큰 경계심을 가지고 주목해야 하며, 그것들을 매우 진지하고 주의 깊게 오랫동안 신중하게 검토한 뒤에 채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이익이 결코 정확히 공공의 이익과 일치하지 않는 계급, 그리고 사회를 기만하고 심지어 억압하는 것이 그들의 이익이 되며, 따라서 수많은 기회에 사회를 기만하고 억압한 적이 있는 계급으로부터 나온 제안이기 때문이다.”

<국부론 1권 11장 중>

 

몇몇 사람들은 그의 주장을 단편적으로 가져와 정부의 역할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고 말하지만 당시 경제력과 보편적 관념을 비추어보았을 때 정작 애덤 스미스 본인은 정부의 역할을 어마어마하게 늘리려 한 사람이었다. 결국 우리가 국부론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왠만하면 시장을 그대로 두라’는 주장 앞에 '정의의 법을 어기지 않는 한'이라는 강력한 전제조건이 붙어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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