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나니머스’(Anonymous) ‘익명의’라는 뜻, 이는 최근 해커 집단을 일컫는 고유명사처럼 쓰이고 있지만, 사실 이 어나니머스는 인터넷 게시판의 익명 이용자를 뜻하는 말이었다. 얼마전 그들은 우크라이나를 무력으로 침공한 러시아의 국방부 웹사이트와 국영 방송인 RT News의 웹사이트를 해킹하며 사이버 전쟁을 선포했다.
인터넷에서의 짓궂은 장난을 일컫는 말 ‘트롤링,’ 이 트롤링 문화가 시작되던 2000년대 초, ‘4chan’이라는 커뮤니티 사이트가 등장한다. 회원등록을 요구하지 않는 이 익명의 게시판에 게시물을 올리면 작성자 이름은 자동으로 Anonymous, 즉 ‘익명’으로 설정된다. 그러므로 어나니머스는 특정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익명으로 게시판을 이용하는 모두를 지칭하는 것이다.
4chan의 익명 이용자들은 랜덤 게시판을 중심으로 각종 트롤링을 했다. 스카이프를 통해서 장난전화를 중계하거나, 소셜미디어를 해킹하거나, 특정 타깃을 정해 대규모 인원이 장난을 벌이는 ‘레이드’ 등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사실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도가 지나친 범죄 수준의 문제까지 일으키며 사회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트롤링의 대상이 국가나 단체의 주요 기관이나 공인뿐만 아니라, 개인에까지 이르게 된다.
주요 언론들은 이들을 ‘내부의 테러리스트’(Domestic Terrorists)라 칭하며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한편, 웹사이트 4chan의 규모는 서버 트래픽을 빈번히 초과할 정도로 점점 더 커지며 익명 이용자들을 위한 ‘트롤링의 성지’가 되어갔다. 그런데 2008년, 4chan의 분위기가 확~ 바뀌는 일이 벌어진다. 미국의 사이비 종교인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와 4chan의 이용자들 간에 전쟁이 벌어지면서였다.
*사이언톨로지교(Scientology)- L. 론 허버드가 1954년에 창시한 신흥 종교이이다. 인간은 영적 존재라고 믿으며, 과학기술을 통한 정신치료와 윤회도 믿고 있는 종교로 알려져 있다.
그 전쟁의 시작은 사이언톨로지 신자였던 할리우드 배우 ‘톰 크루즈’의 영상이었는데, 톰 크루즈가 사이언톨로지 교회에서 연설하는 영상이 유튜브에 유출되었고, 이는 인터넷상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며 주목을 받게 된다. 4chan의 이용자들은 주로 이 사이비 종교사상에 대하여 조롱을 했는데, 사이언톨로지 측이 저작권을 이유로 영상의 삭제를 요구했고, 결국 해당 영상이 사라지게 된다.
4chan의 이용자들은 인터넷 화제였던 영상이 삭제되자, 사이언톨러지의 유튜브에 대한 ‘검열’이라고 주장했고, 익명 이용자 다수가 사이언톨로지와의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어나니머스의 성명서가 발표된다.
“We are Anonymous. We are Legion. We do not forgive. We do not forget. Expect us.”
“우리는 어나니머스다. 우리는 군단이다. 우리는 용서하지 않는다. 우리는 잊지 않는다. 우리를 기대하라.”
4chan의 익명 이용자들에게 붙던 이름인 어나니머스, 그 익명의 이용자들이 처음으로 자신들이 어나니머스라 선언하며 정체성을 가진 집단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나니머스는 사이언톨로지와의 전쟁을 ‘프로젝트 채널로지’(Project Chanology)라 명명하며, 이 작전명에 따라 대규모 공세를 펼친다. 4chan의 해커 그룹이 해커가 아니어도 사용할 수 있는 간단한 프로그램과 툴을 제작해서 자신들과 뜻을 함께하는 다른 어나니머스들에게 배포하고 공유했다.
어나니머스들은 이렇게 프로그램으로 무장해 사이언톨로지 관련 웹사이트들의 대규모 ‘디도스’ 공격을 시작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전화와 팩스를 통해 공격을 하기도 했고,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때 시위현장에서 일부 참가자들이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데, 이는 2005년에 개봉해서 흥행했던 영화 ‘브이포벤데타’(V For Vendetta)의 주인공이 착용했던 혁명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가이포크스’ 가면이었다. 이 가면은 훗날 어나니머스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렇게 프로젝트 채널로지를 통해 사이비 종교를 대상으로 막대한 활약을 보여준 어나니머스, 처음에는 그저 장난인 트롤링으로 시작했던 것들이 이제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며 점차 사회운동의 모습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채널로지에 참여했던 4chan의 익명유저들, 즉 어나니머스들은 이제 4chan을 떠나 그들만의 본거지를 만들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어나니머스는 비밀 자체 게시판과 채팅 프로토콜을 설정하고 자신들의 흔적을 지운 이후 4chan을 떠난다. 이를 기점으로 ‘조직’으로서의 어나니머스가 탄생하게 된다. 이전에는 그저 인터넷 익명 게시판에 모여 있던 불특정다수의 이용자들이었다면, 본거지를 정한 후 그곳으로 이동한 이후에는 어나니머스라는 집단 정체성을 공유하는 조직의 구성원들이 된 것이다.
그들은 자체 네트워크를 통해 규칙을 정하고, 작전을 세우고, 토론을 한다. 어나니머스에는 리더나 지위부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나니머스를 취재해온 한 탐사보도 저널리스트 ‘파미 올슨’(Parmy Olson)에 따르면 조직을 이끄는 리더십 체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나니머스 내 누군가가 어떤 행동을 촉구했을 때, 여기에 여론이 모이면 함께 집단행동을 시작하는 식이다. 심지어는 회원제로 운영되는 것도 아니어서 누구든 참여할 수 있는 성격의 조직 이라고 한다.
즉 누구든 어나니머스의 방식을 믿고, 스스로를 어나니머스라 칭 한다면, 그것이 곧 어나니머스인 것이다. 결국 4chan에 모인 익명 이용자들이 여론을 만들어 트롤링을 하던 것과 비슷한 방식이지만, 어나니머스는 조직의 정체성으로서 정의를 표방하고, 이를 위해 집단행동을 한다는 점이 기존(4chan)과 많이 다르다. 그리고 실제로 어나니머스의 조직원들은 마치 고담시티의 배트맨처럼 온라인의 그림자 속에서 자신들이 정의 롭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하기 시작한다.
2008년, 마침내 조직으로서 탄생한 어나니머스, 그들은 이후 각각의 구성원들이 믿는 정의에 따라 다양한 활동들을 펼친다. 이들이 벌인 작전들 중에는 실제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와 찬사를 받은 일들이 있다.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고, 세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 활동들이다. 이런 일들 때문에 상당수의 사람들이 어나니머스를 ‘영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어나니머스는 아랍의 독재자들 몰아내고, 시민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성취할 수 있도록 각종 지원활동에 나섰다. 독재 정부의 웹사이트에 디도스 공격을 가하고, 시위에 대한 정부의 단속을 방해했으며, 독재자를 위해서 일하는 정부 관리들의 개인정보를 공개했다. 같은 해 어나니머스는 ‘작전명: 다크넷’(Operation: DarkNet)을 실시하기도 했는데 다크넷에 숨어있는 아동 포로노 싸이트 40여 개를 찾아내 대대적인 디도스 공격을 벌였다.
이 웹사이트를 자주 방문하는 이용자 1,500명의 신상정보를 계시 했으며, 인터폴과 미국 FBI의 후속조치를 요청했다. 그 다음 해인 2012년에는 중국정부를 공격했는데 무려 485개의 중국정부 웹사이트를 해킹했고, 해킹된 사이트에 “중국 정부에게, 당신들은 무적이 아니다. 오늘은 당신들의 웹사이트가 해킹되었지만, 내일 무너지는 것은 당신들의 역겨운 정권일 것이다.”라는 메시지가 게시했다.
어나니머스는 중국정부의 억압적이고 부당한 정책들을 비판하고 조롱했으며, 자유를 위해 중국정부에 맞서 싸우라는 내용의 글들을 남겼다. 또한 이 싸움을 위해서 해킹과 프로그램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어나니머스 중국지부에서 모집한다는 공지를 하기도 했다. 이 사건이 있고 얼마 후에는 북한 정권과의 사이버 전쟁을 선포하기도 했는데 북한 주요 사이트에 디도스 공격을 하고, 북한의 대남 선동 매체인 ‘우리민족끼리’를 해킹해 회원계정 15,000여 개의 신상정보를 공개했다.
어나니머스는 유튜브 영상 성명을 통해서 북한 정권에 네 가지를 요구했는데, 첫 번째, ‘김정은 사임,’ 두 번째, ‘북한 내 자유 민주주의 확립,’ 세 번째, ‘핵무기 완전 폐기,’ 네 번째, ‘모든 시민들의 자유로운 인터넷 접근.’ 등이었다. 6.25 전쟁 63주기 때에는 북한 웹사이트를 추가로 공격해서 북한의 군사 문건을 확보했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2015년 11월, 프랑스 파리에서 IS의 테러가 벌어지자, 어나니머스는 IS의 트위터 계정 10만여 개와 웹사이트 149개를 먹통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후 전 세계 일곱 곳에서 벌어질 예정이었던 IS의 테러 계획을 폭로해 추가테러 또한 막기도 한다. 그 다음해인 2016년에는 해커양성을 위한 무료 온라인강의 프로그램 공개하기도 했는데 이 무료강의는 세계적 위협인 IS에 맞서 해커들을 키우겠다는 취지로 실시간 프로젝트였다.
2020년, 어나니머스는 UN의 웹사이트를 해킹하기도 했다. UN 웹사이트에 1971년 탈퇴 이후 다시 가입하지 않은 대만의 관련 페이지를 만들어 넣었다. 중국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대만의 국기와 중국 국민당 로고 등을 걸어놓기도 했다. 국제사회에서 횡포를 부리며 대만을 억압하는 중국 공산당에 대한 어나니머스의 시위였다. 이렇듯 어나니머스는 독재와 권력에 맞서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 왔고, 강자의 횡포에 맞서 약자의 편에 서는 활동을 해왔다.
그리고 얼마 전인 지난 2022년 2월 25일, 어나니머스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상대로 사이버 전쟁을 선포했다. 어나니머스는 사이버 전쟁을 시작한지 하루 만에 러시아 국방부의 웹사이트를 마비 시켰으며, 그들의 데이터베이스(DB)를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어나니머스가 탈취한 데이터베이스에는 러시아 공무원들의 이메일과 비밀번호, 전화번호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어나니머스는 또한 러시아의 국영 방송국인 ‘RT News’의 웹페이지마저 해킹해, 현재 러시아 RT News의 웹사이트는 접속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RT News는 텔레그램(Telegram)을 통해 “이날 오후 5시부터 디도스 공격을 받고 있다. 디도스 공격 트래픽의 27%가 미국에서 나오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와 같은 어나니머스의 공격에 대부분의 네티즌들은 강한 지지를 보내고 있으며, 어떤 이들은 그들을 세계의 영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번에 어나니머스가 러시아를 해킹한 것은 러시아군에게 무력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세계 해커들에게 도움을 청한 뒤 일어났는데 어느 나라도 섣불리 개입할 수 없는 이 상황 속에서도 어나니머스는 러시아에게 사이버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이렇게 어나니머스는 단순 정치적인 활동뿐만 아니라 범죄나 테러 또는 전쟁에도 맞서며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데 기여하기위해 노력하고 있다. 수사기관, 정부당국, 국제기구 등이 어찌하지 못하는 문제들에 개입해 활약해온 어나니머스, 인터넷의 그림자 속에서 활약하는 이 해커 들을 보고 사람들은 가면을 쓴 슈퍼히어로를 떠올린다.
정의를 표방한 익명의 해커집단 어나니머스, 논란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위의 어나니머스의 활동들은 분명 우리 세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특히 독재자의 맞서는 시민들을 보호하고, 무력 군사행동을 비판하고, 범죄를 예방하고, 테러를 막고, 무료로 강의를 하는 등 이러한 행동들에서는 조직원들의 진정성이 느껴진다.
그러나 어나니머스라는 조직은 그 특성 때문에 명백한 문제점들과 한계점들을 가지고 있다.
첫째, 리더십이 없는 체제이기 때문에 방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나니머스는 지도자나 지휘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나니머스에 소속된 개인들이 어나니머스로서 원하는 행동들을 하는 것이다. 자체 게시판이나 채팅창에서 충분한 지지를 받으면 집단 작전이나 행동이 되는 방식이다. 이렇다보니 구성원 각각의 관심사나 도덕관념에 따라 활동의 성격이 판이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2010년, 어나니머스는 미국정부의 극비정보를 폭로했던 ‘위키리크스’를 지지하고 나서며 미국 수사당국과 금융회사 등에 디도스 공격을 벌였다. 어나니머스는 이를 통해 대대적인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었는데, 불과 얼마 후 어나니머스의 이름으로 난데없이 기업 ‘소니’(SONY)를 공격하게 된다. 소니가 플레이스테이션 불법 프로그램을 사용한 이용자들이 게임을 못하도록 막자, 이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디도스 공격과 해킹을 한 것이다.
당시 어나니머스의 명분은 소니가 정보 공유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것이었는데, 사실 이는 핑계일 뿐이고 해적판 프로그램을 사용하다가 제재를 당한 게이머 중 어나니머스의 소속원들이 있었고, 이에 대한 보복성 공격이었다는 해석들이 나오게 된다. 위키리크스를 지지했던 이유와 똑같은 명분으로 소니를 공격한 것인데 전혀 다른 의도와 맥락이 있었던 것이다. 어나니머스를 조사해온 탐사보도 저널리스트 파미 올슨은 중앙 체제 없이 개별 인원들이 원하는 행동을 어나니머스의 이름으로 벌이는 모습들을 두고 테러조직 ‘알카에다’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평한 바 있다.
어나니머스가 진정 정의를 표방하는 집단으로 남기 위해서는 일정한 방향성과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체계나 질서가 부재한 상태로 다크넷상의 익명 해커 여론에 의해 움직이는 조직은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둘째, 어나니머스의 아마추어적인 성격인데, 어나니머스는 사법 체계와 공조하지 않는다. 그들은 시스템 바깥에서 활동하는 외부인들이자, 비관계자들이다. 따라서 어나니머스가 좋은 의도로 범죄의 척결 등에 나셨다고 해도, 이것이 오히려 사법정의를 실현하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모두가 칭찬하고 환호했던 어나니머스의 아동 포르노 사이트 소탕작전인 작전명: 다크넷, 어나니머스의 유능한 해커들이 다크넷의 범죄행각들을 찾아내 단죄한 일이었지만, 이를 부적절하게 바라보는 전문가 여론도 있다.
어나니머스의 의도는 분명 좋았지만, 아마추어 집단이 나서서 범죄자들을 단죄하려하는 과정에서 기존 수사를 방해하고 훼손하거나, 증거 등을 손상시켜 수사당국이 기소에 필요한 증거를 수집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범죄자를 소탕하기 위해서는 사법체계 안에서 수사당국의 협조를 하는 식의 기여가 매우 중요한데 여기에 아마추어가 직접 나설 경우, 범죄자에게 제대로 죄를 묻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셋째는 어나니머스의 독선이다. 어나니머스의 조직원들과 해커들은 법 부위에서 혹은 법망 밖에서 활동한다. 익명성이라는 가면을 쓰고서 온라인 상태로 법, 정부, 여론 등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자신들이 하고 싶은 행동을 한다. 자신들이 곧 정의인 셈이다. 그런데 그들이 정의의 이름으로 벌이는 행동들이 항상 옳을까?
2016년 미국 대선 시기, 어나니머스는 공화당 대선주자였던 ‘도널드 트럼프’ 에게 전면전을 선언했다. 이 후 트럼프를 공격하기 위해서 개인 정보들을 공개하고, 선거유세를 방해하며, 반 트럼프 캠페인을 벌이는 등 상당히 ‘정치적인 태도’를 보였다. 트럼프에 대한 문제의식과는 별개로, 당시 트럼프는 공정한 선거를 치를 권리가 있는 선거 후보였으며 미국 국민 상당수가 지지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나니머스는 트럼프에 대한 정치적 적개심을 바탕으로 불법적 선거방해 행위를 감행한 것이다.
‘정의’의 이름으로 이런 행동을 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이는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지난 박근혜 정부 당시,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청와대, 국무조정실, 국무총리비서실 등이 해킹을 당했다. 청와대 페이지에는 새누리당의 당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신상정보 10만 건이 공개되었다. 자료가 계시된 페이지에는 “새누리당 부정선거에 반대한다. 정권은 책임을 느끼고 당장 사퇴하라.” 등의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글의 마지막 부분에는 어나니머스의 구호가 있었다.
당시 떠돌던 부정선거 음모론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어나니머스 라 칭한 해커가 해킹을 자행한 것으로 추정 되는데, 이 사건에 대해서 자신을 어나니머스의 일원이라고 밝힌 한 트위터 유저가 어나니머스가 해킹을 한 것이 아니라는 반박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청와대를 해킹했던 것은 어나니머스인가? 아니면 이를 모방한 개인인가? 하지만 이러한 고민은 중요하지 않다. 요점은 스스로를 어나니머스라 칭한 해커가 정의의 이름으로 청와대를 해킹했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언급하지만, 어나니머스는 회원제로 운영되지 않는다. 조직 체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 익명의 해커들의 집단일 뿐이다. 누구든 어나니머스의 방식을 믿고 스스로를 어나니머스라 칭한다면 그것이 곧 어나니머스인 것이다. 그리고 어나니머스의 방식은 바로 해커 개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의를 사이버 세상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그것도 법 위에서 말이다.
이런 종류의 독선은 매우 위험하다. 특히 익명 속에서 견제 받지 않는 개인이 품기에는 몹시 위험한 종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독선은 종종 히어로를 빌런으로 만들고, 영웅을 악당으로 만들 수 있다.
어나니머스, 그들의 정체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그들은 과연 선 일까? 아니면 악 일까? 또는 정의일까? 불의일까? 영웅 일까? 혹은 악당 일까? 어쩌면 어나니머스라는 집단을 이렇게 어느 한쪽으로 정의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나니머스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인터넷의 유령들이 모여 있는 게시판과 같은 것이니 말이다. 정의를 표방하는 각각의 개인들, 해커들이 독자적인 판단과 행동을 하는 과정에서 때때로 협력을 하는 공간, 그래서 어나니머스는 하나의 집단이 라기보다는 실체가 없는 광장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속에는 수많은 영웅과 수많은 악당들이 섞여 있다. 그래서 어나니머스가 선인가? 악인가? 정의인가? 불의인가? 영웅인가? 악당인가? 하는 질문에는 답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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